무자기한
삿 세바랏나, 라마스와미 벤카타라만 본문
라마스와미 벤카타라만(1910년 12월 4일 ~ 2009년 1월 27일)은 인도의 변호사,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마드라스 대통령령 탄조레 지역의 라자마담 마을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마드라스 고등법원과 인도 대법원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부터 인도의 독립운동가였고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참여했고 제헌의회와 임시 내각의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로크 사바에 4번 당선된 후, 연방 재무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 1984년, 7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87년에 8대 대통령이 되었고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재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벤카타라만은 타밀나두 탄조레 인근 파투코타이 인근 라자담 마을에서 태어나 파투코타이의 고브트 남자 고등학교와 티루치라팔리의 국립대학 학부 과정을 졸업했고 마드라스 로욜라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마드라스 로스쿨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하는데 졸업 후 벤카타라만은 1935년에 마드라스 고등법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1951년에 대법원에 직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법률 활동을 하는 동안 영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인도를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에 참여했으며 1942년 영국 정부에 대한 인도 국민회의의 유명한 저항운동으로 의해 2년간 구금되기도 하였지만 이 기간 동안 법에 대한 벤카타라만의 관심은 계속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946년 영국에서 인도로의 권력 이양이 임박했을 때 인도 정부는 일본 점령 기간 동안 협력 혐의로 기소된 인도 국민들을 변호하기 위해 말라야와 싱가포르로 파견된 변호사 패널에 그를 포함시켰고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마드라스 지방 변호사 연맹의 서기를 지내게 됩니다.
정치경력
법률과 무역 활동은 벤카타라만의 정치의 관심 및 관련 활동을 증대시켰는데 인도의 헌법을 입안한 제헌의회 의원이었으며, 1950년 인도의 임시 의회(1950-1952)와 제1대 국회(1952-1957)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52년 국제노동기구 금속무역위원회 회의에 노동자 대표로 참석했으며 뉴질랜드에서 열린 영연방 의회 회의에 인도 의회 대표단의 일원이었고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의회당 서기장을 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57년 다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로크 사바에서 사임하고 마드라스 주 정부에 입성하였고 1957년부터 1967년까지 산업세, 노동세, 협력세, 전력세, 교통세, 상업세를 담당했는데 이 기간 동안, 마드라스 입법 위원회, 즉 상원 의장을 맡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산업부 장관
1967년 연합 계획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산업, 노동, 전력, 교통, 통신, 철도 등의 분야를 맡아 1971년까지 많은 활동을 하다가 1977년 마드라스 선거구에서 로크 사바에 당선되어 야당 국회의원과 공공 회계위원회 의장을 지내게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연합 내각의 정치위원회와 경제위원회, 국제통화기금, 국제부흥개발은행, 아시아개발은행 등의 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1953년, 1955년, 1956년, 1958년, 1959년, 1960년, 1961년 유엔 총회 대표를 맡았고 이 기간 중인 1958년 제네바에서 열린 제42차 국제노동회의 인도 대표단의 지도자였으며, 1978년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의회 회의에 인도 대표로 참가했고 1955년부터 1979년까지 유엔 행정 재판소의 이사로 재직했으며 1968년부터 1979년까지 유엔 행정 재판소의 회장을 역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부 장관
1980년 로크 사바에 재선 되었고, 시만텍이 이끄는 정부의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는데 후에 연합 국방부 장관으로 또 임명되었고, 인도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시작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며, A P. J. 압둘 칼람을 우주 프로그램에서 미사일 프로그램으로 전환하고, 통합 유도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으로 명명하면서 미사일 시스템 전체를 통합했다고 합니다. 인도의 대통령 및 부통령 국방부 장관 이후, 인도의 부통령을 역임하고, 1987년부터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4명의 총리와 함께 일했으며, 5년 임기 동안 V P 싱, 찬드라 셰카르, P V 나라심하 라오 등 3명의 총리를 임명했다고 합니다.
질병 및 죽음
2009년 1월 12일 요로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육군병원에 입원했는데 1월 20일 저혈압과 대장균 감염이 발견되면서 위독해졌고 결국 2009년 1월 27일 뉴델리 육군병원에서 98세의 나이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특이한 점은 국경일인 공화국의 날 다음 날 사망했기 때문에, 고(故)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와 상응하는 일부 프로그램들이 취소되었다는 점이며 라지가트 근처의 에크타 스탈에서 완전한 국가 예식으로 화장되었고 이때, 프라티바 파틸 대통령, 모하마드 하미드 안사리 부통령, 만모한 싱 총리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명예 및 표창
마드라스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마드라스 의과대학 명예 펠로우, 루르키 대학교 사회과학 박사, 버드완 대학교 법학박사로 알려져 있고 자유 투쟁에 참여한 공로로 탐라 파트라를 받았고, K. 카마라지의 사회주의 국가 방문에 관한 여행담으로 소련 토지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유엔 행정 재판소장으로 재임 중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기념품을 받았고, 칸치푸람의 산카라차랴가 그에게 "삿 세바랏나"라는 칭호를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