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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예 퇴진한, 에제르 와이즈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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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예 퇴진한, 에제르 와이즈만

무자기한 2021. 11. 25. 22:03

에제르 와이즈만 (1924년 6월 15일 – 2005년 4월 24일)은 이스라엘의 제7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이 전에는 공군 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전기

1924년 6월 15일 팔레스타인 텔아비브에서 예치엘과 예후디트 와이즈만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인 하임 와이즈만의 조카였다고 합니다. 아크레와 하이파에서 자랐고 히브리 리얼리 학교에 다녔는데 모세 다얀의 아내 루스 다얀의 누이인 르우마 슈와르츠와 결혼하여 슬하에 사울과 미갈을 낳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영국 육군에서 훈련을 받았고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서부 사막 캠페인에 트럭 운전사로 복무했다가 1943년, 영국 공군에 입대했고 로디지아의 항공 학교에 다녔는데 1945년까지 이집트에서 RAF와 인도에서 복무했으며 공군에서 하사 조종사로 복무를 마쳤다고 합니다. 1944년에서 1946년 사이에 팔레스타인 지하에 있는 이르군 부대의 일원이었고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영국에서 항공학을 공부했으며 1947년 당시 팔레스타인 주둔 영국군의 사령관이었던 에블린 바커 장군을 암살하려는 계획에 연루되어 다른 이르군 요원과 함께 런던에 있는 바커의 집 밖의 도로에 굴을 파서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런던 경찰청의 의심을 받고 영국을 떠나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군 경력

이스라엘 건국 후, 와이즈만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하가나의 조종사로 복무했는데 니르암 근처의 네게브 항공대의 지휘관이었다고 하며 1948년 5월,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스케 부데요비체 공군기지에서 아비아 S-199(메서슈미트 Bf 109)를 조종하는 법을 배웠고, 이스라엘 최초의 전투 임무에 참여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1949년 1월 7일 이스라엘과 영국 공군 간의 전투에서 그는 영국 전투기 19대를 공격한 4대의 이스라엘 스핏파이어 전투기 중 1대를 조종했고 영국 공군 호커 템페스트가 IAF에 의해 격추되어 조종사가 사망하게 됩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방위군에 입대하여 참모총장을 지냈고, 1951년 영국의 앤도버에 있는 영국 공군 참모대학교에 입학해 공부가 끝난 후 돌아와서 라마트 다비드의 사령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1958년부터 1966년까지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이후 참모차장을 지냈는데 1966년, 이라크의 전투기 조종사와 이스라엘에 중요한 정보를 준 미그 전투기의 망명을 인도 지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67년에는 이집트 공군기지에 대한 이른 아침 기습공격을 지휘했는데, 이는 이집트 공군을 3시간 만에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시나이 전장에 대한 완전한 공군 우위를 갖게 했으며 6일 전쟁 첫날 이스라엘 공군에 의해 총 400대의 적기가 파괴되었다고 하며 1966년 IDF의 참모차장이 되었지만, 1969년 군에서 은퇴했다고 합니다.

정치 경력

군대에서 은퇴한 후, 와이즈만은 우익 정당인 가할당에 입당해 1970년 가할이 연합을 떠날 때까지 레비 에슈콜의 국가 통합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냈으며 1972년 가할을 그만뒀지만 1976년에 돌아와 리쿠드가 되었고 1977년 메나헴 베긴 밑에서 국방장관이 되었는데 임기 동안 이스라엘은 IAI 라비 전투기를 개발했고 레바논 남부에서 PLO에 대항하는 리타니 작전을 개시했다고 합니다. 도널드 네프가 베이트잘라에서 벌어진 학교 주변과 문이 닫히고 가스통이 발사된 사건에 대해 타임지에 기고한 후, 와이즈만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젊은이들을 상대로 한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이었다는 팔레스타인의 주장을 다시 재조사하게 되었고 위원회에서는 베이트잘라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하자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군 주지사 데이비드 하고엘 준장을 팔레스타인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해고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와이즈만의 견해는 더욱 온건파적으로 되었는데 1977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아랍어를 구사한 와이즈만은 이집트 협상가 부트로스 갈리, 호스니 무바라크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때를 두고 사다트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이스라엘인이다. 그는 내 남동생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들은 1978년 캠프 데이비드의 협정에 정점을 찍은 회담과 이듬해 이집트와의 평화 협정에 결정적인 요소였지만 1980년 5월, 정부를 떠나고 리쿠드에서 축출된 모셰 다얀과 함께 새로운 당을 설립하는 것을 고려했는데 이후 4년 동안, 정치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1984년, 야하드를 창당했고, 1984년 선거에서 3석을 얻었는데 이 정당은 시몬 페레스, 이츠하크 샤미르가 번갈아 총리를 역임하는 국민통합정부에 합류하게 되었고 1986년 10월 야하드는 요시 사리드와 마팜당이 연합을 탈퇴한 후 연합과 합병하게 되었으며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아랍 문제 담당 장관과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냈다고 합니다.

대통령

1993년 3월 24일에, 이스라엘 국회인 크네셋에서 66표 대 53표로 와이즈만을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1993년 5월 13일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1996년 평화협정을 추진하기 위한 시도로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카이사리아에 있는 그의 집을 개인적으로 방문하도록 초대했으며 1999년, DFLP 지도자인 나예프 하와트메를 만나 "나는 악마가 평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와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리아와의 평화를 대가로 공개적으로 골란고원 철수를 지지했고, 이에 대해 우익 정당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1999년 말, 신문들은 와이즈만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사업가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주장을 당국에 보고하지 않고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와이즈만은 기소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논란으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2000년 7월 13일 사임의 효력이 발효되었습니다. 5년 후인 2005년 4월 24일 카이사레아의 자택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