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기한
마지막 겐로,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 본문
사이온지 긴모치(1849년 12월 7일 ~ 1940년 11월 24일)는 일본의 정치가로 1906년부터 1908년까지, 1911년부터 1912년까지 일본 총리를 역임했고 1920년 후작에서 황태자로 승위하게 되었는데 일본 겐로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정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냈다고 전해집니다.
유년기
도쿠다이지 킨히토의 아들로 태어나 1851년 사이온지 가문에 입양되는데 두 가문 모두 교토 황궁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친부모 근처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훗날 메이지 천황이 된 왕자의 소꿉놀이 친구로서 궁궐을 방문하라는 명령을 자주 받았고 훗날 이들은 가까운 친구가 됩니다. 친형제인 도쿠다이지 사네츠네는 나중에 일본의 추밀원 구성원이 되었고 또 다른 남동생은 매우 부유한 스미토모 가문에 입양되어 추후 스미토모 자이바츠의 주인이 되었으며 여기서 나온 스미토모 자금은 사이온지의 정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황실과의 친밀한 관계는 그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고 말년의 정치 생활에서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귀족 가문의 후계자로서 어릴 때부터 정치에 참여했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유명했는데 1867년과 1868년, 보신 전쟁에 참여해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고 젊은 메이지 천황이 왕위에 오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밖에 대 일본 제국 대표로서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며 기록 중 하나는 싸움 없이 가메오카 성을 점령하는 것에 대해 쓰여 있습니다. 또 사사야마 성에서 수백 명의 사무라이가 인근 도로에서 만났지만 그를 본 수비군이 즉시 항복했다고 전해지며 그 시기의 그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만든 황실 깃발을 획득하는데, 붉은 들판에 해와 달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무라이들은 제국의 깃발을 가진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들의 군주를 쉽게 배신하게 되었으며 2주 후 사이온지는 키츠키에 도착했고, 또 한 번의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둔 뒤에 배를 타고 오사카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해외연수
메이지 유신 후 사이온지는 모든 지위에서 사임하게 되는데 오무라 마스지로의 지원으로 도쿄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였고 샌프란시스코로 항해하는 30명의 다른 일본 학생들과 함께 일본을 떠나게 됩니다. 여행 중 워싱턴 DC에서 미국의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를 만났고 대서양을 건너 13일 동안 런던 관광을 하다가 마침내 1871년 5월 27일 파리에 도착하는데 당시 파리는 혼란 속에 있었고 이는 사이온지에게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스위스와 니스를 거쳐 마르세유에 정착하여 그 도시의 억양으로 프랑스어를 배웠고 파리의 혼란이 정리되자 다시 파리에 왔고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이때,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 아콜라스 법학 학교를 설립한 에밀 아콜라스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이온지는 매우 반동적인 견해를 갖고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아콜라스의 영향을 받아 평화와 자유의 동맹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이를 계기로 당대의 일본의 주요 정치인 중 가장 자유주의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사이온지는 1869년에 리츠메이칸 대학과 메이지 법학 학교를 설립했으며 이 학교는 1880년에 메이지 대학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1882년,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 주요 국가의 헌법을 조사하기 위해 유럽을 방문했고,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온지에게 동행을 부탁했는데, 이 여행 후 이토 총리는 사이온지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임명했고, 이후에는 독일과 벨기에 대사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정치 경력
일본으로 돌아온 사이온지는 추밀원에 합류하여 피어스 하우스의 부회장을 역임했습니다 . 제2·3대 이토(1894~1896, 1898)와 제2차 마쓰카타 정부에서 문부대신을 지냈는데 재임 기간 동안 교육 커리큘럼의 질을 국제적(즉, 서구적) 표준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00년 이토는 릿켄정유회를 창당했고 여기에 사이온지가 초대 당원으로 합류했는데 유럽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사이온지는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의회 정부를 지지했다고 전해지며 의회의 다수당이 내각 구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몇 안 되는 초기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1900년 8월 추밀원의 회장이 되었고, 1903년에는 릿켄정유회 회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총리
1906년 1월 7일부터 1908년 7월 14일까지, 1911년 8월 30일부터 1912년 12월 21일까지 총리에 재임했는데 두 번의 시기는 모두 자유주의 성향인 사이온지와 강력한 보수 성향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대립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사이온지와 이토는 정당을 정부 기구의 유용한 부분으로 보았지만, 야마가타는 정당과 모든 민주주의 기관을 부패하고 분쟁에 집중하는 등 비합리적인 집단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많은 수요와 한정된 자원으로 국가 예산과 씨름해야 했는데 야마가타는 군대의 최대 확장을 끊임없이 추구했습니다. 사이온지의 첫 내각은 1908년 야마가타가 이끄는 보수파에 의해 무너졌는데 이때 보수파였던 야마가타는 사회주의의 성장을 두려워했고, 정부의 사회주의자 탄압(퍼레이드와 폭동 이후)이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11년 두 번째 내각을 맡게 되지만 역시나 야마가타의 영향에 의해 사임하게 되는데 이 사건은 군대가 내각의 사임을 강요할 수 있다는 선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황실이 수호되어야 하며 정치에 직접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이는 귀족과 황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천황이 직접 일본 정치에 참여하여 의회와 내각을 약화하려는 군대의 민족주의자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였고 야마가타를 기시로 한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세계주의자"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원로 정치가
1912년 12월 사이온지는 겐로로 임명되는데 이들의 주요 기능은 수상을 선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수상 후보를 황제에게 지명하여 승인받았지만, 황제는 그들의 조언을 거부하지 않았는데 1924년 마츠카타 마사요시가 사망한 이후 사이온지는 유일한 겐로였습니다. 이는 사이온지가 1940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거의 총리를 지명하는 특권을 행사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최소한 육군과 해군의 암묵적 동의의 필요성에 의해 항상 제약받았는데 효과적인 정부를 구성할 만큼 충분히 강할 때만 정치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하며 필요할 때 군인과 무당 정치인을 지명했다고 전해집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 대표단을 이끌었지만,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 상징적인 역할에만 국한되었다고 하며 1920년 공직생활에 대한 공로로 공자(公爵)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상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상당히 미움을 받았고 1936년 2월 26일 쿠데타 미수에서 암살 대상 명단에도 올랐다고 합니다. 경력의 대부분 동안 정치적인 문제에서 일본 제국군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노력했는데 히로히토 천황의 고문 중 가장 자유주의적인 사람 중 하나였으며 영국 및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선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