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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개혁을 시행한 요한 루돌프 토르베케

무자기한 2021. 11. 23. 04:13

요한 루돌프 토르베케(1798년 1월 14일 ~ 1872년 6월 4일)는 19세기 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정치인 중 한 사람이며 10번째 총리를 역임했으며 자유주의 정치가인데, 1848년에 네덜란드 헌법 개정안의 초안을 작성하는 위원회를 이끌었고, 왕에게는 더 적은 권한을, 총독에게는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으며, 국민에게 더 많은 종교적, 개인적,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려 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과 교육

즈볼레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인 프레데릭 빌렘은 독일 계통의 루터교 담배 제조업체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은 프랑스 점령군의 반영국 정책으로 인해 심하게 타격을 받았고 결국 담배 공장은 1803년에 파산하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근면하고 모범을 보이며 지성과 호기심을 보였는데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부모님의 희생 덕분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출생지와 암스테르담에서 초등 교육을 받으며 1806년까지 그곳에서 살았고, 1814년까지 즈볼레에 있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이후 암스테르담에서 아니시우스 폴리오를 중심으로 한 고전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라이덴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후 독일 여행을 위한 국가 장학금을 받아 4년 동안 여행을 하며 역사주의와 낭만주의를 접하고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발전했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1824년 네덜란드로 돌아온 후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여 첫 번째 중요한 정치 저작인 ‘법과 국가에 대한 우려 (Bedenkingen aangaandehet Regt en Den Staat〉을 집필했고 이듬해 겐트 대학에서 정치학과 교수가 되는데 원래 윌리엄 1세의 보수 정부에 대한 충성스러운 지지자인 토르베케는 1830년대 내내 정부에 대한 보다 비판적인 견해와 함께 독자적인 정부 체제를 발전시켰고 1844년에 출판된 ‘현대 시민권에 대해’에서 보통 선거는 결국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치 경력

1844년 5월 21일 하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결국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로 크게 되며 그해 말에 같은 생각을 가진 8명의 의원과 힘을 합쳐 이른바 발의안을 만들었고 4년 후, 1848년 혁명으로 유럽의 많은 지역이 혼란에 빠졌을 때, 윌리엄 2세는 헌법개정위원회 구성에 합의하게 되고, 3월 17일 이 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법안의 변경 사항은 대부분 토르베케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의 초기 헌법 저작물을 기반으로 하는데 헌법 초안은 이후 어렵사리 미국 총독부의 승인을 받았고 1848년 11월 3일에 공포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헌법은 시민권과 의회 권한을 확립하고 하원 의원의 직접 선거와 장관의 책임을 도입하여 국가를 완전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만들었다고 평가됩니다. 이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주재 각료회의를 따랐고 사실상 네덜란드의 총리로 인식되는데 그의 첫 번째 내각은 1850년의 선거법과 지방법, 그리고 이듬해의 지방자치법을 포함하여 특히 중요한 몇 가지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개혁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많은 저항을 받았고 특유의 거만함과 왕과의 경직된 관계로 인해 비판받았습니다. 1853년 가톨릭교회는 네덜란드에서 위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옹호하는 문제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가톨릭 동정 혐의를 받고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후 하원에서 야당 대표로 9년을 보냈고 1854년 크림 전쟁에서 중립을 주장했고 1857년 초등 교육법의 종교적 성격에 반대했으며 1862년 보수 내각의 붕괴로 다시 집권합니다. 1862년 1월 31일에 내무장관과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고 과거에 좋지 않았던 왕의 관계는 개혁의 초점이 정치에서 경제로 옮겨갔기 때문에 개선되었고,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각은 가톨릭의 지지로 4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두 번째 임기에는 종교 활동에 대한 정부 부서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다른 주목할만한 성과는 여러 운하의 건설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보조 교육법과 건강증진에 여러 역할을 하였으며 지방 자치 세제 개혁을 펼치다 충돌에 부딪혀 결국 사임하게 되었고 1868년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지만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는데 3년 후, 이 내각이 외교 정책으로 무너진 후, 73세 때 주저 없이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1871년 12월에 병에 걸렸고 완전히 병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1872년 6월 4일 74세의 나이로 헤이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특유의 거만한 성격으로 일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오늘날 네덜란드 의회 역사에서 우뚝 솟은 인물로 간주됩니다. 토르베케의 동상은 3개(암스테르담에 1개, 헤이그에 1개, 즈볼레에 1개)가 있으며 네덜란드 국회의사당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방이 있다고 합니다. 역사에 대해 많은 기사와 그날의 주제에 대한 여러 신문 기사를 썼고 독일어로 되어 있는 역사 철학에 관한 연구를 출판했고 이후, 그의 의회 연설은 모두 출판되어 전해집니다. 슬하에는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